홍지석(미술비평)
이 글은 2011년 개인전에 제시될 홍성철의 근작들에 대한 가능한 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헤아려 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작들에 대한 검토는 불가피하다. 2011년의 근작들은 제작태도, 형식, 의미 모두에서 전작, 특히 2007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홍성철의 근작들이 선 형태의 가는 줄(실)들을 위/아래로 평행하게 이어 붙여 만든 것이라는 데 주목하기로 하자. 작가는 철로 만든 프레임의 위/아래에 구멍을 뚫고 그 사이에 가는 줄(string)을 연결한다. 그 행위가 무수히 반복되어 100개의 줄이, 1000개의 줄이 연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들의 형태는 현악기-이를테면 하프의 외양( )과 닮았다. 그 가는 선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기본 단위를 어떤 체계/규칙에 따라 반복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홍성철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제작 방식이다. 예컨대 이 작가는 신문지를 겹쳐 하나의 덩어리(mass)로 만들거나 -(1994), (1995), 천정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수많은 실들을 입방체 형태로 제시하거나-(2000), (2002), 점등하는 작은 직사각형 셀(solar cell)들을 벽면에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하는- (2007) 작업에 몰두해왔다. 주목할 점은 대부분의 경우(특히 2000년 이후)에 부분(기본단위)은 전체 형태 속에 파묻혀 사라지기보다는 독자성을 지니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전체도 가시적이지만 부분(단위)들도 가시적이다. 달리 말하면 홍성철의 작업은 관객들에게 전체를 보라고 요구하면서 부분도 보라고 요구한다. 관객 입장에서 작품 가까이에서 부분을 볼 때는 멀리 떨어져 전체를 보고 싶어지고, 전체를 볼 때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부분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그것은 부분들의 미세한 움직임/떨림이다. 부분(단위), 또는 부분들의 결합은 어떤 움직임(효과)를 창출한다. 가령 에서 기본 단위는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가늘고 가벼운 실이다. 가늘고 가볍기 때문에 그것은 주위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반응하여 움직인다(떨린다). 좀 더 정확히 그 움직임/떨림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에 그 움직임들/떨림들이라 해야 한다. 에서 그 떨림들은 작은 셀들의 반짝임들이다. 여기에 더해 작은 단위들의 반복으로 인해 우리 지각 수준에서 야기되는 착시 효과들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착시 효과는 로 통칭되는 근작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어떻든 부분들/부분들의 조합들이 창출하는 움직임(효과)는 앞서 언급한 부분-전체의 왕복운동을 좀 더 역동적으로, 보다 리드미컬하게 만든다. 즉 부분을 확인하고 전체를 본 다음 이 양자를 (지적인 수준에서) 연관짓는 일이 아니라 차라리 부분과 전체의 상호작용에서 창출된 어떤 리듬을 타는 일이 부각될 것이다. 언젠가 윤두현이 지적한 바 “누구나 작품 앞에서 서면 춤을 추듯 움직이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렇듯 리듬을 타는 일(춤추듯 움직이는 일)은 고정된 실체 하나하나를 파악하고 인지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부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그 비결정적, 순간적 관계(효과들)에 반응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홍성철의 작업을 감상하는 일은 음악을 듣는 일과 유사하다. 音과 音의 결합에서 창출되는 박자와 리듬을 타는 일. 홍성철의 근작에서 그것은 줄과 줄의 관계에서 창출되는 리드미컬한 분위기와 흐름을 타는 일이다. 또는 음악에서 다음 순간 사라져 버릴 소리를 지각하듯 홍성철의 작업에서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하지만 곧 사라질 양태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다시 보면 그 줄의 배치는 악보의 그것과도 꽤 닮아있다!
이제 관심을 이미지/그림 수준으로 돌려보기로 하자. 거기에 어떤 이미지/그림이 있는가? 일단 근작들의 직접적인 선례라 할 수 있는 2007년 인 갤러리 개인전에 선보인 작품들을 되짚어 보기로 하자. 이 작품들에서 두드러진 이미지는 (줄들 위에 프린트된) ‘손’의 이미지다. 그것은 어떤 손인가? 내게 그것은 ‘연주하는 손’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하프’의 줄을 타는 연주자의 손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로서의 (고무)줄은 이미지 또는 환영(illusion) 수준에서 현악기-하프의 줄/현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양상을 염두에 두고 다시 2007년 작들에 제시된 손 이미지를 보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 그 배면에 또 하나의 손이 있다. 그것은 두 번째 층(layer)에 프린트된 손 이미지다. 그 손은 첫 번째 층에 등장하는 손과 유사하지만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 배면에 또 하나의 층이 있고 거기에 또 다른 손 이미지가 있다. 거기에는 많게는 10겹 이상의 중층적 손 이미지가 겹쳐 있다. 즉 이미지 수준에서도 “기본 단위(여기서는 손 이미지)를 어떤 체계/규칙에 따라 반복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는 홍성철 특유의 구성방식이 관철되고 있다. 이미지 수준에서 이러한 구성방식은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가? 일단 미래파 작가(Giacomo Balla)의 ‘연주하는 손’ 이미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층의 겹침을 통한 이미지의 중첩은 정지된 평면에 가변적 움직임(또는 시간적 경과)을 나타내는 특단의 방식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중요한 것은 손 이미지 하나하나를 파악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손 이미지들의 겹침에서 야기되는 움직임(효과)에 반응하는 일이다.
요컨대 홍성철의 2007년 ‘손 이미지’ 작업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음악적인 수준을 지향하고 있다. 즉 이 작품들은 시각적인 것의 청각적인 것으로의 전환에 관계한다. 볼프강 벨슈(Wolfgang Welsch)가 지적한대로 시각적인 것이 항구적,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관계한다면 청각적인 것은 일시적이고 덧없고 사건적인 것에 관계한다. 때문에 청각적으로 된다는 것은 ‘조사, 통제, 확인’이 아니라 “순간적인 것에 대한 예민한 집중, 일회적인 것에 대한 지각, 사건에 대한 개방성”을 추구하는 일이 된다. 반대로 시각적으로 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을 객관화하기 위해 뒤로 물러남(거리두기)을 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각과 청각의 교환, 사건적 상황에 대한 몰두는 (2001), (2002)에서 확인할 수 있듯 홍성철 작업 전반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성이다-는 관객의 소리에 반응하여 움직이고 펴지는 손 이미지를 다룬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이고 는 등지고 서있는 영상 속 인물이 관객의 소리에 반응하여 뒤돌아보고 다가오고 사라지는 절차를 구현한 인터랙티브 설치 작업이다.
그런데 아직 다루지 못한 작품이 있다. 그것은 손과 손이 서로를 굳건히 맞잡고 있는 상황을 제시한 작품들이다. 여기서 손은 연주를 중단하고 있다. 이 경우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 자체’로 향하게 된다. 홍성철의 작품은 대개 규모가 크고 그 ‘손 이미지’는 클로즈업됐기 때문에 ‘손 자체’에 주목할 경우 부각되는 것은 그 ‘주름들’이다. 그 주름들은 그 손의 임자가 살아온 시간, 경험이 차곡차곡 누적된 지층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름이 부각된 손 이미지는 앞서 언급한 손 이미지의 중층적 겹침에 대응하는 등가 이미지다. 그 주름/중층적 겹침은 시간적 전개(역사)를 공간에 동시에 펼쳐 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 주름, 또는 중첩된 층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고립시켜 단독으로 관찰할 수 없다. 즉 그 전체적 양상을 하나의 단어, 하나의 양상으로 규정짓기가 참으로 곤란하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불가분하게 얽혀있어 풀기 힘든 실타래 같은 것이다. 홍성철 자신은 이러한 양상을 인간 존재가 처한 실존적 상황에 비유한다. “나라는 실체의 의미는 그 자체로 닫혀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지연되고 연기될 뿐 궁극적인 실체와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작가노트)
이제 2011년 전시에서 우리가 보게 될 작품들을 언급할 차례다. 이 작품들은 지향성, 제작방식과 기본 구성에서 2007년의 전작들과 유사한 궤도에 있다. 즉 여기에는 전작에서 두드러진 바, 부분과 전체 가운데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는 양가적 태도, 부분들의 떨림에서 야기되는 움직임 효과(또는 음악적/청각적 지향성), 이미지의 중층적 겹침에서 드러나는 운동과 시간성에의 몰두가 여전히 부각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도 ‘손’ 이미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그 손이 이제 구슬들(을 연결한 줄)을 붙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슬들을 연결한 줄은 목걸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염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손은 그 구슬들을 풀고 당기고, 엉키고, 헤아리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전작들에서 하프의 현으로 보였던 줄들은 그 모방적(도상적) 성격을 잃고 그저 줄 자체로 보이게 될 것이다. 좀 과도한 해석을 곁들이자면 그 줄은 악보 오선지를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면 구슬 이미지는 악보 위에 배치될 음표들( )을 지시하는 기표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든 구슬/줄과 연관된 운동은 현악기 연주와는 달리 떠들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것을 악보와 음표처럼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2011년의 홍성철은 2007년 전시에서 지배적이었던 청각적 분위기를 다소간 경감시키고 있다. 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손에 구슬을 부여함으로써 생긴 또 다른 변화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구슬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작가의 몸)가 뒤로 물러남으로써 앞서 이야기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주름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 주름은 ‘옷 주름’이다. 즉 (모델이)구슬을 붙잡고 나름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옷에 주름이 생기게 됐다. 주목할 점은 그 주름이 앞서 언급한 손(몸)의 주름과 질적으로 상이한 주름이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시간의 경과와 기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손(몸)의 주름과 달리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주름이다. 이 같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주름은 손과 몸에 집중했던 2007년작들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다. 반면 여기서 작가는 그 옷에 화려한 색상을 부여하고(아니면 적어도 옷의 색상을 용인하고) 특별한 조명을 가해 옷에 생긴 주름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2007년 자신이 주름에 부여했던 과도한 의미부여를 상쇄시킨다.
정리해보자. 홍성철은 기본적으로 상반되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한다. 그것은 일종의 외줄타기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외줄타기(놀이)가 늘 그렇듯 균형 잡기는 늘(궁극적으로) 실패하고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면 그는 다시 외줄에 오른다. 이렇게 보면 시소놀이가 보다 적합한 비유일 수 있다. 올라갔다 내려온다. 그리고 다시 올라간다. 두더지 잡기 놀이에 비유하면 어떨까? 돌출된 것(그럼으로써 배타적인 주목을 요하는 것)을 타격하여 들어가게 한다. 물론 그러면 다른 것이 다시 튀어나온다. 이것을 작가 자신의 말을 인용하여 ‘실체와 주체의 의미 붙잡기 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을 홍성철은 ‘Solid but Fluid’라고 명명했으나 ‘static but dynamic’, ‘good but bad’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 작가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solid’나 ‘fluid’보다는 ’but’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