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로 드러나는 삶,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정체성

홍성철 작품론

정용도

홍성철은 삶의 본질과 예술의 근원에 대한 서술 매체로서 멀티미디어 아트를 도입한다. 이런 기술적 매체들에 의해 생산되는 동영상 이미지들은 전통적인 매체들의 예술적 표현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구체적인 사건들과의 관련 속에서 그의 정신적 상황들의 내밀하고 밀도 높은 부분들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외화 시켜 정착시키는 정신의 생산물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예술작품이라는 한 개인의 구체적인 생산물은 사회와의 다양한 소통방식을 주제로 그 자체의 미학적 채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런 면에서 홍성철의 작업이 의미의 개별적 특수성을 생산하는 최후의 단자로서 판단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의 작업을 멀티미디어 아트의 차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작품의 내용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동영상 시각매체를 통해 작가의 예술 정신과 관객의 작품 감상 행위가 서로 직접적으로 상호 소통하는 가능성의 차원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개별 작가의 미학적 특수성을 떠나 일반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 생산의 도구들이 그러하듯이 예술적인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성격을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확대되어 사회의 인상을 결정하는 다양한 힘으로서 확대되어가고 있다.
인위적으로 의미를 생성시키는 예술적 행위의 근거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고 또한 그 생존의 기반에서 작용하는 창조의 충동은 삶의 의미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개별적 인간들의 미학적 지향성으로 인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예술작품을 통해 자연적인 질서를 창조하는 노력을 예술 창조의 기본적인 세계관으로서 다듬어 왔다. 그리고 이런 현상 속에서 현대미술의 주요한 조류로서 정착하고 있는, 소위 영상이라는 보편적인 타이틀로 통용되며 현대 과학의 다양한 기술적 결과들을 이용해 생산되어 사회 속에서 마치 독립적인 존재론적 실체처럼 작용하는 이미지는 이미 그 의미의 성격을 규정하는 단계를 넘어 우리 인간 생활의 일부처럼 작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정한 인간적 생산물들의 본질과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우선 이미지에 있어서 의미의 구조나 형식이 중요한 인자가 아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끝없이 생산되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존재론적 성격을 범주 지워 구분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이미 서구에서는 1960년대 이후 혹은 한국에서는 엄밀히 말해 1980년대 후반 이후 보편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런 예술과 사회현상의 비정의적 특성, 즉 다원주의적 특성을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틀을 통해 정의하고자 하였다.
이 시대의 예술적, 사회적 현상이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정의적 특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일견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논리를 정의하려는 모순적인 태도 같이 보이기도 하고 또한 이성, 합리성, 논리, 의미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철학적 도구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현상들을 가지고 해석하려는 시도, 즉 분해된 의미의 파편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보편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현상적 사건들을 투영하는 시도로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인간의 보편적 삶과 유사성을 지닌 형상들을 그 자체의 공간적인 질서를 지닌 세계에 편입시키려는 전통 미술의 미학적 시도와, 그런 사유의 틀을 통해 드러나는 재현적 이미지의 형식적 질서를 영상 혹은 이미지의 구체적인 특성들을 해석하는 관련적인 구조 분석의 틀로서 원용하려는 현대 멀티미디어 아트의 시도간의 컨텍스트적인 차원에서 연결성을 수립하는 것이 현재 멀티미디어 아트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는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즉 전통미술 작품에서 회화나 사진을 포함한 여타 다른 예술 작품들은 본질적으로 이미지를 통해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과제로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아트의 이미지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지의 순환을 통해, 즉 이미지들의 흐름이나 운동이 환기시키는 분위기를 통해 관객의 정신적, 물리적 참여를 추구한다. 여기서 의미는 이미지 각각의 단속적인 정지화면이 아닌 작품의 지속적인 물리적 운동을 기반으로 한 실제적 차원의 의미연결을 통해 가능해진다.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은 사진의 발명이후 예술작품의 기술복제가 가능해지게 됨으로써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aura)가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가 복제에 대해 말한 것은 고전 작품의 이미지를 사진적으로 복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사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복제에 대한 의견을 그 동안 회화가 누려왔던 재현의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서 전환시킨다. 그러나 재현(representation)의 시도는 이 세상의 다양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고착 시켜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로부터 혹은 또 다른 기원은 원시의 인간들이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주술적인 도구로서 이용한 것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재현의 방법들이 인간의 역사 속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미학적 역동성의 차원이 더욱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술의 차원은 형식적인 차원이 아닌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transformation)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적인 사물들이나 혹은 인간이 자기들 삶의 주변에서 그들 스스로 목격하는 현상들을 정확히 작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단지 사실적인 차원의 진리성에 대한 판단의 차원을 뛰어 넘어 이제는 작품 스스로 가지고 있는 예기치 못한 영역, 즉 작품이 스스로 발생시키는 의미에 대한 탐구로 확대되어 왔고, 이런 것들이 미술의 역사를 구성해 왔다. 이는 예술작품의 내용으로서 묘사되는 형식적 장치들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 고리들의 논리적 연결성을 뛰어넘어 필연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사회적 컨텍스트로의 자발적인 간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들을 우리는 삶의 총체성에 연결시켜 모든 것들이 서로 모든 것들에 다소간의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를 미학적 논의의 과제로 삼는다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 상당한 넌센스가 될 것이다. 진위판단을 유보 시키는 수많은 사회적 현상들이 우리 삶의 곳곳에서 존재하며 또한 예술작품은 진실과 거짓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개방성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홍성철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 신문지를 중첩 시켜 고기덩어리를 만들었다. Red Wash 시리즈 작품들은 푸줏간의 진열대에 놓여있는 고기를 표현한 Red Wash I 로부터 시작하여 푸주간의 냉장고 안에 걸려 있는 고기덩어리 Red Wash II, 그리고 이제는 냉장고 같은 형상이 아니라 철망 안에 걸려있는 고기덩어리와 도살된 소의 반쪽을 음각으로 새겨넣고 선을 넣어 소의 신체부위를 인간이 등심, 갈비 등등 소고기의 종류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선으로 구별해놓은 Red Wash III는 작가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인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해준다. 우선 재료적인 측면에서 작가는 고기 덩어리의 형상에 맞추어 신문을 오려내었고, 그것을 마치 실제의 고기덩어리처럼 가공하였고, 시리즈 마지막 작품에서는 작가적인 자의식의 표출로서 자신이 바라보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측면은 신문의 싸구려 광고란의 한 부분에 자신의 사진을 넣어 마치 광고의 한 부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함몰 시키고자 한 듯 보이는 < > 통해 대단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국의 작가 데미언 허스트(Admian Hirst)는 실제로 양이나 돼지, 혹은 여타 다른 동물들을 전체적으로 반으로 쪼개어 플라스틱 글래스 안에 박제시키듯 집어넣어 놓은 작품을 보여주었다. 허스트는 그의 작품을 만드는데 실제 동물을 이용했지만 홍성철은 신문지를 이용해 소와 고기덩어리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허스트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동물의 공격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착한 작가(?)’ 홍성철은 그의 작품을 통해 생명체들의 공격성을 어디 다른 곳에 가두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공격성을 보고 느끼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의 예술행위의 책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그의 작가적 자의식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그의 작가적인 자의식의 단초들을 비디오라는 기계적 이미지 생산의 매체를 통해 이미지의 연속적인 전개라는 의미에서 분열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1999년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Dying에서 홍성철은 폴랜드의 극작가 스테니슬라우스(Stanislaus Witkiewicz, 1885-1939)의 글 한 구절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간 삶의 존재론적 죽음(mortality)에 관해 말하고, 죽음은 비디오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가까이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실제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왜 그런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오는가, 그리고 그런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왜 서로의 삶에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가를 질문하고 있으며 또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 Red Wash 시리즈 작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공격성에 대한 성찰과도 연결된다. 작가는 여기서 대다수의 많은 인간들이 사춘기 시기에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만한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소년기적인 섬세함이 이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작품에서는 미학적이라기 보다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주제를 찾아 항해하는 젊은 청년의 예술적 형식의 탐구에 대한 집중이 그의 예술행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관객은 여기서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행위의 여정이 어떤 방향으로 지속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성철은 2000년 작품 White Cube(2002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에서 다시 설치해 전시한 작품)를 통해 그의 감성적인 섬세함을 실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천정으로부터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는 수많은 가닥의 실은 작가가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삶과 죽음을 시간의 진행 속에서 파악하는 은유로서, 2002년의 개인전에 설치된 작품에서는 음악을 도입하여 하나의 전체적인 실체로서 실루엣처럼 떨리고 있는 실의 미세한 움직임과 현대음악의 불안한 듯한 단속적인 사운드를 통해 작품을 보고 있는 관객의 시지각적 반응과 심리적 반응을 종합하려고 시도한다. 음악소리와 미세한 공기의 유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떨리고 있는 실들은 인간이 그들 삶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건들에 반응하는 심리적 상황에 대한 느낌 혹은 개인으로서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과 한계에 대한 서술적인 실체로서 작용한다. 작가는 그의 의식을 통해 이 세계에서 인간들이 수용할 수 밖에 없는 무차별적인 실존적인 상황들에 대한 관계를 최소화 하기 위해 실이라는 매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상황제시는 String Tongue 시리즈 작품들을 통해 제시된다.
벽에 실을 연결하고 자신의 입으로부터 실을 뽑아내고 있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String Tongue I (2000년) 에서 작가는 이제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지속되는 입을 통해 나오고 있는 실은 작가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설정하는 방법이다. 미국 작가 부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은 자신의 입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는 장면을 사진의 스틸사진으로 찍은 그의 1966-67년도 작품 Self-Portrait as a Fountain을 통해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 작가 마르셀 뒤샹이 1917년에 변기를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전시에 출품하면서 작가의 권위에 대한 주장을 한 것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두 작가 모두 작가의 개인적 자의식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방법으로서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서양의 두 대가들이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예술적 창조의 절대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홍성철은 이들과는 반대로 작가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될 것에 관해 고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작가 모두가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홍성철은 2001년도에 제작한 인터액티브 비디오 설치작품 String Tongue III 을 통해 좀더 개방된 측면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String Tongue I 에서 볼 수 있었던 실이 매달려 있던 흰색의 벽 –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는 – 이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색 배경의 화면에는 단지 작가의 상체 부분들과 실만이 보일 뿐이다. 여기서 작가는 부루스 나우만이나 뒤샹의 예를 들어 말했던 것처럼 작가적인 자의식을 좀더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관객들의 움직임을 감지해 관객들의 위치에 따라서 변화되는 이미지들은 당신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당신에게는 중요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소극적인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이 전환되는 시점이고 그는 이것을 작품과 관객과의 교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상호작용성(Interactivity) 이라는 수단을 통해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자기 이외의 인간들의 심리적 혹은 물리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상당히 소년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행위를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유발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는 분명 한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린시절 끊임없이 학교와 가정에서 주입 받게 되는 소극성이다. 그런데 그는 상호작용성이라는 멀티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물리적, 개념적인 장치를 통해 그의 관찰의 범주를 확장 시킬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정형적인 시민으로서의 소극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고 이 세계와 교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컴퓨터 모니터 뒤에 숨어서 인터넷을 통해 채팅을 하면서 서로 모습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대담해질 수 있는 심리와 연결시킬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작가의 모습으로 인해 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 소극적 인간의 모델일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외화 시키는 것에 대한 염려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작가는 인터액티브 비디오 설치 작품 Open Me (2001)를 통해 그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와 게임을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주먹 쥔 손은 관객의 소리에 반응하여 움직이고 펴진다. 그런데 손은 우리의 몸에서 표현력이 대단히 뛰어난 부분이다. 우리는 손과 손가락을 통해 고통, 절망, 분노, 승리 등등의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다. 홍성철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상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고 또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작가적인 자의식의 첨예한 부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번역하면 “나를 열어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의 마음을 열든 그렇지 못하든 그에게는 별로 관계가 없다. 단지 열 수 있으면 열어보라는 것이다. 열면 열리고 열지 못하면 관두라는 그런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여기서 어느 정도 작가로서 정착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집단은 작가가 이 세상의 실체로서 인식하는 실체이고 또한 작가가 관계를 설정하는 주요 대상이다. 작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인터액티브 비디오 설치작품 Reflex (2001)는 홍성철이 작가로서 이 세상과의 관계 맺음을 완성하고 정리하는 그런 작업이다. 그는 자신의 입 부분만을 클로즈업하여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글의 사실적인 내용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작가로서 이곳에 존재하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 변화는 이미지에 대한 그의 인식이 이미 멀티미디어라는 새로운 매체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작가의 예술과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최근의 비디오 설치작품 Please Call Me (2002) 를 통해 다시 한번 강화된다. 관객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작품 속의 인간은 관객이 부르거나 소리를 내면 뒤를 돌아보고 관객의 소리가 커지면 가까이 다가오다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2001년도의 Open Me, Reflex 등의 작품에서 작가가 자신의 심리적 상황을 이 세상과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의 기반으로 응용했다면, Please Call Me 에서 이제 작가는 예술작품 자체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당신이 보고있는 것이 예술인지 예술이 아닌지를 판단해 보라는 듯 말하고자 하는 것 같고, 당신들의 판단에 관계없이 – 작가의 이런 태도는 관객을 완전한 타자로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와 관객의 관계를 다양한 삶과 그 삶에 관계된 행위들이 공존하는 사회적 컨텍스트 안에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게임 같은 것이다 – 예술작품의 고유한 역할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예술에 대한 그 동안의 개인의 심리적 측면의 소극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품이 사회적 판단의 대상으로서 기능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 동안 전통미술이라는 범주의 관점에서 볼 때 폐쇄적이었던 관객의 층을 멀티미디어 아트 작품을 통해 불특정 다수로 확대시킴으로써 그가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의외의 관객들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와 미학적 발전과정은 예술작품의 매체로서 기술 미디어를 이용하는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런 특성일 것이다.
최근의 컴퓨터 관련 장치를 기반으로 디지털 기술을 통해 생산된 멀티미디어 아트의 이미지는 인터넷을 통해서 혹은 TV를 통해서 동시에 수많은 관객들에게 분배될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미술관이나 특정 장소에서만 볼 수 있었던 회화와 조각을 포함하는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매체를 이용해 생산된 작품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수많은 멀티미디어 아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지 못한 멀티미디어 아트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생성 장치들이 우리 인간 삶의 개별적인 구조적 특성을 반영할 수 있다는 희망은 있지만 어떤 면에서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독립적인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성철의 작품에서 현재 멀티미디어 아트의 작가와 이미 TV나 영화를 통해 충분히 단련된 수많은 관객들 간의 지각적인 차이에서 발생하는 바로 이 부분을 해소 시키고자 하는 사유와 같은 또 다른 부분의 노력이 강렬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작가가 예술작품을 주로 자신의 미학적 개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한 시각예술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개념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체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디오 테잎에 담길 수 있고 CD에 저장될 수 있지만 물질적인 존재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제 멀티미디어 아트의 이미지는 미학적 원칙들을 통해 분석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다양한 문화 현상들이 수용되는 하나의 집합적이고 가상적인 전체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멀티미디어 아트는 우리 개별적 인간들의 사소한 행위와 사건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아트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즉 이미지의 진행은 몇 개의 중심축을 가지고 진행되고, 이미지의 구조적 진행상황이 그런 형식적인 중심 축 – 내러티브라고 말하기도 한다 – 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지의 무차별적 제시 혹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개별적인 독립성 – 어느 하나의 중심을 축으로 해서 형성된 통일성이 없는 단순한 집합상태 – 이 최대한 존중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현재의 멀티미디어 아트를 수용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자체를 고민하는 인식론의 차원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영화도 마찬가지 겠지만 멀티미디어 아트에 의해 생산되는 이미지는 개별 이미지가 아닌 시간의 흐름을 통해 전개되는 과정적인 이미지들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마치 인간 정신의 흐름과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아트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가시적인 대상으로 실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어진 제목의 상황 안에서 종합된 하나의 예술적 상황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멀티미디어 아트의 이런 특성과 관련하여 홍성철이 그의 예술작품을 생산해온 여정에서 이미지에 대한 접근을 적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멀티미디어 아트를 자기 정신의 개인사적인 변화 과정을 기록하는 장치로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영상을 생산하는 매체의 특성상 인간 정신의 변화과정과 멀티미디어 아트의 이미지의 전개과정의 유사성을 직접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어쩌면 기술매체를 이용하는 작가들이 쉽게 발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작업의 진행 과정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마도 홍성철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이런 유사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본능적인 것이었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