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 택 (미술비평, 경기대학교 교수)
1. : 손가락 크기 정도의 직사각형 액정 유닛(LCD unit)들이 자체 태양열집진소자를 통해 빛 에너지에 반응해 지속적인 깜빡임을 반복한다. 이 유닛은 빛이 닿을 때마다 시간차를 두고 점멸하는데 이것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한편 각각의 유닛이 시간차를 두고 점멸함으로 생명력 넘치는 에너지의 흐름을 보여준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표현 단위인 픽셀을 의미하는 액정 유닛들로 구성된 이 작품을 마주선 관람객은 작품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과 유닛의 깜빡임을 통해 새로운 매체의 독특한 감성을 경험하게 된다. 흐리고 어두우면 잔잔하게 움직이고 밝으면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이 유닛들은 랜덤하게 추상적 형상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또한 이것은 디지털 픽셀 같기도 하다. 아울러 자연의 빛에 반응하므로 자연과의 상호작용 역시 지칭한다.
2. : 물성이 강한 줄(일종의 고무줄)이 규칙적으로 배열되면서 착시에 의한 동적 파동을 발생시키고 각줄마다 맺혀진 이미지는 깊이 차에 의해 입체적 대상으로 인식된다. 서로 다른 이미지간의 교차는 이미지 자체의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으로 지각된다. 각 이미지는 서로가 조우하면서 이중 삼중의 다른 이미지로 변화하면서 작품은 단 한순간도 고정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관람객의 운동 지각적 반응을 자극한다. 이때 움직임의 드라마는 관람자가 완성하는 것이다. 원근의 변화와 평면과 입체의 혼재를 보여준다. 작품을 마주선 관람색은 아무런 전기적 장치가 없는 이 작품에서 강한 디지털 감성을 느낀다. 아울러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작가의 의문을 제기한다. 사진은 어떤 장면을 포착해 정지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몸을 촬영해 인화지가 아닌 가느다란 줄에 프린트에 고정시켰다. 그 결과 관람객들이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양이 나타난다. 이렇게 분해되고 해체된 몸의 모습은 실재하면서도 부재한 것 같은 묘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실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허상으로 사라지고 순간순간 덧없이 소멸해 가는 이미지다. 동시에 순간적이고 평면적인 사진에 시간성과 입체성을 첨가한 셈이며, 더불어 율동감과 운동감 또한 개입시켰다. 홍성철의 작품은 실들이 만들어내는 레이어에 의해 자연스럽게 렌티큘러를 사용한 작품처럼 관객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 현상이 생긴다. (렌티큘러-윤영석, 박성현, 배준성 등의 작업)
관람객이 스스로 몸을 움직임으로써 마치 신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창조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과 신체는 하나의 운동과정, 하나의 시간대를 공유한다. 몸-실-신체가 된다. 이것은 주체와 객체가 하나의 상호교차로 맞물리는 상황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시간에 대한 객관적 경험자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 자체가 이미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세삼 깨닫게 해준다. 또한 형태, 물질, 사물로 채워지는 조각적 공간의 문제를 조각적 시간의 문제로 바꾸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는 끊임없이 다르게 되는 즉, ‘생성하는 조각’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물질적 결과로서의 조각이 아니라 물질을 포함한 정신적 장이자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3. 실과 거울, 눈의 진동 그리고 디지털
실(糸)-실타래가 두 개 세로로 나열된 형태에서 파생/ 신화적 맥락(페넬로페, 수명)
미로를 빠져나옴, 캔버스역시 날줄과 씨줄로 직조된 실의 결집체다.
거울-자아반영, 성찰과 반성, 주체에 대한 인식
거울과 실을 살아있는, 지각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작가는 움직임과 소리 그리고 그에 따른 흥미로운 영상을 고안해 감상자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관객을 적극 참여시킨다. 관람하면서 이동하는 그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보는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패턴의 평면 작품을 제작하여 관람객의 참여와 움직임을 중요한 요소로 하는 옵아트와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인 야코브 아감(1928)이 작업 연상, 아코디온 모양이 돌출된 측면에 선명한 색채를 효과적으로 배치한 작품으로 우측에서는 삼각형과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모양이 보이지만 좌측과 정면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가 보인다. 착시를 일으키는 작업(예, 김동유의 작품)
키네틱 예술가들은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 그들은 진동과 잠재적인 색채에 대해 질문했고 고정된 이미지 안의 모든 것이 신경을 자극한다는 것과 실재적인 움직임에 의해 지속되는 차원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지속의 차원은 영화와 음악이 제공하는 시간 안에서의 전개에 접근하는 것으로 키네틱 아트의 이러한 질문은 시각예술의 한계를 수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진동과 인연이 깊다. 경련까지 고려한다면 인체 내부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박, 혈류, 내장 내벽의 소화를 위한 운동, 이물질에 대한 백혈구의 공격, 표피의 신진대사, 딸꾹질, 근육의 경련 등 끊임없는 운동과 경련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경련하는 인체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련하는 눈의 운동이다. ‘본다’고 하는 눈의 운동은 ‘응시’와 ‘도약’으로 나눌 수 있다. 응시는 계속 보는 것, 도약은 응시와 응시 사이의 순간 이동을 의미한다. 응시하는 시간은 약 0.3초에 불과하지만 이때도 0.001초 단위의 이동은 계속하게 된다. 진동하지 않으면 시각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진동은 눈에 끊임없는 자극을 줌으로써 획득한 시각정보가 지워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자극이 필요하다. 정처 없이 떠도는 시선이 비밀에는 이 범주화의 힘, 즉 사물이나 사건을 알기 쉽게 정리하거나 인지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는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줄, 겹 거울과 착시현상
내용적 측면에서는 인터랙션(소통)
이것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종합적인 의미망을 구축한다. 또한 독특한 시각적 유희를 기반으로 인터랙션을 추구한다. 컴퓨터나 카메라 같은 일반적인 디지털 미디어가 아닌 독특한 매체로 관람객에게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새로운 인터렉티브 작업을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작품을 마주선 관람객은 아무런 전기적 장치가 없는 이 작품에서 강한 디지털 감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